[이슈추적-왜곡된 의료 지형] (上)자고 나면 또 미용·척추 병원

  • 등록 2025.04.24 14:22:20
크게보기

'피성안’(피부과·성형외과·안과)에만 개업 몰려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 필수의료 4과는 기피
10년 새 성형외과 의원 의사 수는 1.8배 늘어
수도권에만 병의원 몰려...지방은 '의료사막'
‘행위별 수가제’ 가 가장 큰 문제

한국헬스경제신문 한기봉 기자 |

 

한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건강보험 체계를 갖췄다. OECD 최고 수준의 의료 접근성, 저렴한 본인부담금, 많은 의사 수. 그러나 그 화려한 외관 뒤에서 의료 지형은 조용히 기울고 있다. 돈이 되는 병원은 넘쳐나고, 아픈 아이를 데려갈 소아과는 사라지고 있다. 이는 개별 의사의 탐욕도, 환자의 과소비도 아니다. 애초에 ‘아이를 살리는 일’보다 ‘주름을 펴는 일’이 더 많은 돈을 버는 시스템으로 설계된 구조의 필연적 귀결이다. 한국 의료계의 왜곡된 지형을 상중하 세 편으로 분석한다. [편집자 주]

 

■ 급증하는 비급여 병원, 사라지는 필수과

 

서울 은평구에 사는 김모(38) 씨는 지난겨울 밤 11시, 40도 고열로 경련을 일으키는 두 살배기 아이를 안고 응급실을 찾아 세 곳을 전전했다.

 

인근 소아과 두 곳은 이미 문을 닫았고, 대형병원 응급실은 성인 환자로 가득 차 두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반면 근처엔 피부 레이저 시술을 광고하는 피부과 다섯 곳과 척추 비수술 치료를 내세운 정형외과 세 곳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이것이 2026년 대한민국 의료 현실의 단면이다. 한국 의료 현장에서 이른바 ‘돈 되는 병원’과 ‘필수 병원’ 사이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 새 성형외과 의원 의사 수는 1.8배, 피부과 의사 수는 1.4배 증가했다.

 

2018년 710개 소였던 성형외과는 2019년 3분기 기준 979개 소로 불어났고, 피부과는 같은 기간 945개소에서 1,317개 소로 급팽창했다.

 

척추·관절을 표방하는 정형외과 개원 역시 꾸준히 늘어, 전국 어느 도심 상가를 가도 ‘OO통증의학과’, ‘OO척추관절병원’ 간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울 강남역 인근 빌딩 숲을 메운 간판의 80% 이상은 성형외과, 피부과, 안과, 그리고 척추·관절 전문 병원이다.

 

반면 필수의료를 담당하는 소아청소년과·산부인과·외과·응급의학과는 크게 줄었다.

 

한국의 의료 인력 분포는 극심한 ‘부익부 빈익빈’ 상태다. 2026년 기준, 피부과와 성형외과 등 이른바 ‘피·성·안’(피부과·성형외과·안과)과 척추·관절 분야는 인력 과잉을 우려할 수준인 반면,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확보율은 수년째 정원의 20~30%대를 밑돌고 있다. 특히 지방의 경우 24시간 소아 응급 진료가 가능한 수련병원이 절반도 되지 않는 실정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요양기관 개·폐업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한 해 동안 전국에서 소아청소년과 의원 89곳이 문을 닫는 동안 새로 문을 연 곳은 59곳에 불과해 신규 개원 대비 폐업 비율이 150.8%에 달했다.
 

산부인과의 개원 대비 폐업 비율은 76.1%, 외과는 73.5%로 역시 높은 수준이다. 마취통증의학과(76.3%)도 사정은 비슷하다.

 

반면 비급여 진료 비중이 높은 피부과의 폐업 비율은 41.9%에 그쳤고, 신경과(12.9%), 재활의학과(33.3%)도 낮은 편이었다.

 

전공의 지원 현황은 더욱 충격적이다. 2025년 하반기 전공의 모집에서 소아청소년과는 정원 770명 중 103명만 지원해 충원률이 17.4%라는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의정 갈등 이전인 2024년 3월과 비교해도 40.3%가 줄어든 수치다.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는 “지난 10년간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는 필수과 중에서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다”며 “전국 수련병원 93개 중 24시간 소아 응급진료가 가능한 병원은 46.2%에 불과하다. 소아청소년과 인력 부족은 수치 문제가 아니라 의료 시스템 붕괴의 전조다”라고 말했다.
 

 

■왜 이렇게 됐나—행위별수가제, 의료사고, 저출산 

 

이 같은 왜곡의 근본 원인은 ‘행위별 수가제’라는 건강보험 지불 구조에 있다. 행위별 수가제는 의료행위 하나하나에 가격을 매겨 지불하는 방식인데, 건강보험 도입 초기부터 실제 원가의 50~75% 수준으로 책정된 저수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렵고 위험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수술일수록 수익성이 떨어지는 구조가 고착화된 것이다. 외과 수술이나 분만, 중증 응급 진료는 투입되는 인력과 장비에 비해 건강보험 수가(의료 서비스 가격)가 턱없이 낮게 책정되어 있다. 생명을 살릴수록 손해 보는 구조다.

 

반면 피부과·성형외과·안과 등은 시술 대부분이 건강보험 ‘비급여’ 항목이다. 병원이 자유롭게 가격을 책정할 수 있어 수익성이 월등하다. 의사들이 생명을 다루는 긴장감 대신 안정적인 수익을 선택하게 만드는 구조적 유인책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2022년 국세청 사업소득 신고 현황에 따르면 안과 의원 한 곳당 연평균 소득은 6억 8,400만 원에 달했고, 정형외과는 4억 4,600만 원, 피부·비뇨기과는 3억 200만 원이었다. 의대생들이 어느 과를 선택할지는 자명하다.

 

소아청소년과 전공의·전문의 대상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90%가 낮은 진료 수가를 기피 이유로 꼽았고, 80%는 의료사고와 법적 분쟁의 위험을 지목했다.

 

산부인과·외과·응급의학과 역시 사정은 같다. 생사가 오가는 중증 수술은 의료사고 위험이 크고, 야간·주말 당직은 불가피하며, 그럼에도 수입은 인근 피부과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필수의료 기피의 결정타는 과도한 법적 책임이다. 고위험 수술이나 응급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때, 의료진이 거액의 민사 배상이나 형사 처벌을 받는 사례가 급증했다. “사람 살리려다 전과자 된다”는 공포가 젊은 의사들을 바이탈(Vital) 전공에서 멀어지게 했다.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로 불리는 필수의료 4과는 기피과의 대명사가 됐다.

 

저출산 문제도 악순환을 심화시킨다. 소아청소년과 기피 이유 중 70%가 저출산으로 인한 환자 감소를 꼽았다. 아이가 줄수록 소아과 환자가 줄고, 소아과 의사가 줄수록 아이를 키우기 어려운 나라가 되는 역설이 반복되고 있다.

 

산부인과의 급감도 같은 맥락이다. 분만 건수가 줄어들고 분만 수가가 낮아 분만을 포기하는 산부인과가 늘면서 이미 전국 시군구의 상당수에서 분만 가능 산부인과가 사라졌다.

 

이른바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로 불리는 필수의료 4과는 기피과가 된 지 오래다.

 

■지방은 '의료 사막' 지대

 

여기에 수도권 집중 현상이 겹친다.

 

새로 문을 연 병의원과 약국의 61.1%가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 몰렸다. 인프라와 수익성이 좋은 수도권으로 인력이 집중되면서 지방은 ‘의료 사막’으로 변하고 있다. 거주지에 따라 생존율이 달라지는 ‘의료 불평등’이 심화됐다.

 

경기도는 개원 대비 폐업 비율이 64.9%로 전국에서 가장 낮았고, 서울(67.9%), 인천(68.9%)도 낮은 편이었다. 반면 전북은 폐업 기관이 신규 개업보다 많았고, 강원(97.9%)·충북(90.2%)은 개원과 폐업이 거의 맞먹었다. 지방에서는 필수의료 공백이 더욱 심각한 것이다.

 

‘지방 의료 사막화’는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시급하고도 복잡한 현안 중 하나다. 단순히 병원이 적다는 문제를 넘어, 생명과 직결된 ‘골든타임’을 지킬 수 있느냐는 생존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지방의 의료 환경이 악화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필수의료 인력의 부재 탓이다. 산부인과, 소아과, 흉부외과 등 응급·필수 의료를 담당할 전문의들이 수도권이나 대도시로 쏠리면서, 지방 소도시에서는 아이를 낳거나 응급 수술을 받을 곳이 사라지고 있다.

 

또 지역 거점 공공병원(지방의료원 등)들이 만성적인 인력난과 재정난에 시달리며 제 역할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에 중증 질환 치료를 위해 이른바 ‘상경 진료’를 선택하는 환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지역 의료 생태계는 더욱 위축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한기봉 기자 healtheconews@gmail.com
Copyright @한국헬스경제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