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헬스경제신문 김혁 기자 |
한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건강보험 체계를 갖췄다. OECD 최고 수준의 의료 접근성, 저렴한 본인부담금, 높은 의사 수. 그러나 그 화려한 외관 뒤에서 의료 지형은 조용히 기울고 있다. 돈이 되는 병원은 넘쳐나고, 아픈 아이를 데려갈 소아과는 사라지고 있다. 이는 개별 의사의 탐욕도, 환자의 과소비도 아니다. 애초에 ‘아이를 살리는 일’보다 ‘주름을 펴는 일’이 더 많은 돈을 버는 시스템으로 설계된 구조의 필연적 귀결이다. 한국 의료계의 왜곡된 지형을 상중하 세 편으로 분석한다. [편집자 주]
미용 시술 중심의 피부과·성형외과 급증은 단순한 공급 과잉의 문제를 넘어선다.
최근 5년간 일반의(전문의 자격 없는 의사)가 신규 개설한 의원의 21.9%가 피부과 진료를 표방했다.
성형외과(10.7%)와 함께 비급여 고수익 과목에 전문성과 무관하게 의사들이 몰리는 현상이 너무나 뚜렷하다. 전문의 자격이 없어도 피부과나 성형외과 시술을 할 수 있는 현행 제도의 허점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
◇근골격계 질환의 실손보험이 부추겨
척추·관절 병원의 폭증도 마찬가지다. 고령화로 근골격계 질환 환자가 늘어나는 시장 논리에 더해, 비수술 치료·도수치료·체외충격파 등 비급여 시술이 새로운 수익원이 됐다.
실손보험의 확산이 이를 뒷받침했다. 환자가 비용 부담 없이 시술을 받을 수 있게 되자 불필요한 의료 이용이 급증했고, 이는 다시 관련 병원의 개원을 부추기는 구조가 형성됐다.
이로 인해 건보 전체 진료비는 2020년 86조 9,544억 원에서 2024년 116조 2,509억 원으로 4년 만에 33.7%나 급증했다.
현재 척추·관절 병원의 과잉 진료 논란과 그에 따른 실손보험금 지급 심사 강화는 의료계와 보험업계 사이의 뜨거운 쟁점이다. 환자 입장에서는 치료가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보험금 거절이나 지연으로 인해 경제적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실손보험사가 척추·관절 치료에 대해 지급을 거절하거나 까다롭게 구는 가장 큰 이유는 의학적 필요성이 별로 없는 도수치료, 체외충격파, 비급여 주사제(영양제 등)가 과도하게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보험사는 “단순히 ‘허리가 아프다’는 주관적 통증만으로는 부족하며, MRI나 CT 등 영상 의학적 결과와 실제 치료 내용이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충분히 외래로 치료 가능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입원 치료를 진행하여 입원료와 높은 비급여 비용을 청구하는 ‘과잉 입원’도 문제다.
이런 문제점이 지적되자 비급여 이용량이 많을수록 보험료가 할증되는 4세대 실손으로의 전환을 유도해 손해율을 관리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소아과, 산부인과의 위기는 심각해
의료 지형의 왜곡은 구체적인 생명 위협으로 이어진다. 소아 응급 체계가 붕괴 위기다.
2025년 조사에 따르면 전국 수련병원 93개 중 소아 24시간 응급진료가 가능한 병원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46.2%에 불과했다. 소아 환자가 갈 곳이 없어 성인 응급실을 전전하거나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소아과 오픈런’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평일 낮에도 소아과 한 곳에 진료를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는 광경은 이미 일상이 됐다.
산부인과 공백은 지방 소멸과 직결된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전국 130개 시군구가 소멸위험 지역에 진입한 원인 중 하나로 필수의료 인프라 부실을 꼽았다.
분만 병원이 없는 지역에서 임산부들은 산달이 되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거나 수십 킬로미터를 달려 타 지역 병원을 이용해야 한다. 의료 공백이 인구 소멸을 가속화하고, 인구 소멸이 다시 의료 공백을 심화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 것이다.
외과와 흉부외과의 인력 부족은 중증 외상과 심혈관계 응급 대응 능력을 갉아먹고 있다. 중증외상센터와 심뇌혈관질환센터 지방 거점들은 인력 부족으로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으며, 일부 지방 병원에서는 수술실이 있어도 마취과 의사가 없어 수술을 미루는 사례도 발생했다.
여기에 수도권 집중 현상이 겹친다. 새로 문을 연 병의원과 약국의 61.1%가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 몰렸다.
이런 여러 문제점에 대해 의료계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는 있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인력 재배치를 위한 정책 없이 의대 정원을 늘린다면 10년 뒤 성형외과·피부과 의사가 수십 배 이상 증가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며 “증원된 인력이 비급여 중심 개원가에 집중된다면 필수의료 고사는 물론 건강보험 체계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해 의료 붕괴가 가속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의료정책 전문가의 말이다.
“분만 가능한 산부인과가 없는 시군구가 속출하고, 소아과 오픈런이 뉴스가 되는 나라. 이것은 의료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라 설계의 실패다. 수가 구조를 손보지 않으면 모든 대책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