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왜곡된 의료 지형] (下)정부 대책과 한계...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소용없다

  • 등록 2025.04.30 14: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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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구조 근본 개혁, 공공의료 확충, 지역 의료 인력 확충이 가장 필요
의사의 사명감을 고취하는 의료 토양 만들어야
‘생명 우선’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결단 내려야

한국헬스경제신문 한기봉 기자 |

 

한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건강보험 체계를 갖췄다. OECD 최고 수준의 의료 접근성, 저렴한 본인부담금, 높은 의사 수. 그러나 그 화려한 외관 뒤에서 의료 지형은 조용히 기울고 있다. 돈이 되는 병원은 넘쳐나고, 아픈 아이를 데려갈 소아과는 사라지고 있다. 이는 개별 의사의 탐욕도, 환자의 과소비도 아니다. 애초에 ‘아이를 살리는 일’보다 ‘주름을 펴는 일’이 더 많은 돈을 버는 시스템으로 설계된 구조의 필연적 귀결이다. 한국 의료계의 왜곡된 지형을 상중하 세 편으로 나눠 분석한다. [편집자 주]

 

전문가들은 단순한 ‘의대 정원 확대’만으로는 독이 든 성배를 치울 수 없다고 경고한다.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위한 입체적 대책이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건복지부는 2024년 ‘의료개혁 4대 과제’를 수립하고, 2024년부터 5년간 필수의료 강화와 수가 정상화를 위해 20조 원 이상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수가 상시 조정 체계를 구축하고, 상대가치점수 개편 주기를 5~7년에서 2년으로 단축하며, 공공정책수가를 도입해 필수의료 행위에 추가 보상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같은 대책이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지적한다.

 

저수가 문제는 건강보험 재정 압박과 연동되어 있어 수가 인상이 쉽지 않다. 2024년 기준 건강보험 누적 적자는 10조 원을 돌파했고, 2030년에는 누적 준비금이 고갈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여기에 의정 갈등으로 인한 전공의 이탈이 필수의료 상황을 한층 악화시켰다. 정부의 독단적인 의대 증원 정책과 의료계의 집단 반발이 충돌하면서 현장 인력 공백이 현실화됐고, 이 여파는 소아청소년과 등 기피과에서 특히 크게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실효성 있는 대책으로 크게 세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필수의료 수가를 실원가 수준으로 현실화하는 것이다. 행위별 수가제의 틀을 유지하더라도, 중증 수술·응급 처치·분만 등 필수 행위에 대한 보상 수준을 대폭 올려야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필수의료 분야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둘째, 비급여 시술의 급여화 및 표준화를 통해 '비급여 쏠림' 현상을 완화해야 한다. 무분별한 실손보험 청구와 연계된 과잉 비급여 시술을 제도적으로 억제하지 않으면 의료 상업화를 막을 수 없다.

 

셋째, 필수의료 의사에 대한 의료사고 책임 완화와 법적 보호 강화다. 설문에서 의사의 80%가 법적 분쟁 부담을 기피 이유로 꼽은 만큼, 의료 행위에 대한 형사 처벌 요건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입법이 시급하다.

 

 

◇지역 의료 불균형 해소와 공공의료 확충

 

지역 의료 불균형 해소와 공공의료 인프라의 근본적 재정비도 다른 문제 못지 않게 절실한 상황이다.

 

현재 한국의 공공의료 비율은 전체 의료기관의 5~6% 수준으로, OECD 평균의 4분의 1에도 못 미친다.

 

민간 병원이 수익성에 따라 진료과와 입지를 자유롭게 결정하는 구조는 지방·필수의료 공백을 부를 수밖에 없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보건복지부 내 공공 일차의료 전담 부서 설치와 지역의료 인력 확보를 위한 제도적 유인책 마련을 권고했다.

 

일부 전문가는 지방 필수의료 종사 의사에게 세제 혜택·주거 지원·학자금 면제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미국·일본·프랑스 등 선진국에서 시행 중인 ‘지역의사제’나 ‘공중보건의 의무복무 확대’ 모델을 한국 실정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의대 증원 논의가 불거진 만큼, 증원된 인력이 반드시 필수의료·지역의료로 유입되도록 복무 조건을 연계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선결 과제로 꼽힌다.

 

◇‘설계의 실패’를 고쳐야 할 때

 

대한민국 의료는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속은 곪아 터지기 직전인 ‘중증 환자’와 같다. 미용과 성형, 척추 진료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생명의 최전선을 지키는 의사들이 사명감을 가질 수 없는 토양에서는 그 어떤 첨단 의료도 모래성일 뿐이다.

 

정부와 의료계, 그리고 국민 모두가 ‘생명 우선’이라는 의료의 본질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결단에 나서야 할 때다.

 

출산율 0.7의 나라에서 소아과가 없어지고, 인구 소멸 지역에서 분만 산부인과가 문을 닫는다면 그것은 숫자 이전에, 이 사회가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는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이제 그 대답을 바꿔야 할 때다. 수가 구조의 근본 개혁, 공공의료 확충, 지역 의료 인력 확보,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작동하지 않으면 ‘필수의료 살리기’는 또 다른 구호로 끝날 것이다.

 

한기봉 기자 healtheco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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