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헬스경제신문 김혁 기자 |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이 “흡연 피해로 인한 진료비를 배상하라”며 담배 회사들을 상대로 제기한 500억 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항소심도 패소했다.
공단은 즉시 상고 방침을 밝혀 법적 공방은 대법원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서울고법 민사6-1부(부장 김제욱)는 15일 건보공단이 KT&G, 한국필립모리스, 브리티시아메리칸토바코(BAT)코리아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건보공단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항소 비용은 공단이 부담하도록 했다. 공단은 2020년 11월 1심에서도 패소했다.
건보공단이 2014년 제기한 이 소송은 공공기관이 원고로 참여한 국내 첫 담배 소송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해외에선 담배 회사가 흡연으로 인한 질병에 책임을 지고 정부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한 소송이 여럿 있었으나 국내는 건보공단 소송 전까진 없었다. 앞서 개인이 담배 회사에 소송을 건 사례가 일부 있지만 모두 패소했다.
항소심재판부는 1심과 마찬가지로 △소송 당사자 자격 △담배의 표시상 결함 여부 △흡연과 암 발병 사이 인과관계 등 주요 쟁점 대부분에서 담배 회사 측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공단의 보험 급여 지출은 국민건강보험법이 예정한 바에 따라 징수한 자본금을 집행한 것”이라며 “담배 회사들의 행위와 보험급여 지출 사이에 인과 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공단이 흡연 피해 당사자가 아니고, 공단의 보험 급여 지출은 법에 따른 의무를 이행한 것일 뿐 담배 회사의 위법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대상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담배 회사가 위해성을 제대로 표기하지 않았다는 건보 주장도 “언론 보도, 법적 규제 등을 통해 흡연이 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정이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졌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또 흡연과 질병 사이 개별 인과 관계가 불분명하다는 1심 판단도 유지했다.
건보공단은 즉각 대법원에 상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기석 건보공단 이사장은 2심 선고 후 법원 앞에서 담배 회사를 교통사고를 내고 책임을 지지 않고 도망간 ‘뺑소니범’에 비유하며 “이번 소송은 흡연으로 인한 폐암 등 치료비가 국민 부담으로 전가된 책임을 묻는 공익소송”이라며 “흡연으로 인한 질병과 사회적 비용의 책임 문제를 사법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정 이사장은 “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은 과학적 진실이고 고혈압, 당뇨 등은 모두 담배가 유발하거나 악화시키는 병”이라며 “법원이 담배 유해성에 대해 이렇게 유보적인 판단을 한 건 비통하지만 언젠가는 인정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외 주요 국가에서는 흡연 피해에 대한 담배 회사의 직접적인 책임이 인정되고 있다”며 “해외 소송에서는 필립모리스와 BAT의 거액 배상 책임이 인정됐음에도 이들이 우리 국민들에게는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상고심 쟁점과 전망은?
건강보험공단 측은 항소심에서 패하자 즉각 상고를 결정해 최종 결정은 대법원이 하게 됐다.
대법원에서 다뤄질 주요 쟁점은 무엇일까.
대법원에서는 1·2심 판결의 법리적 오류를 바로잡는 데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크게 3가지가 핵심이다.
‘유해성 인지 시점’이 현재로선 가장 큰 쟁점이다. 2심은 1960~70년대에도 담배의 유해성이 널리 알려졌다고 보았으나, 공단은 당시 담배회사의 정보 은폐와 국가적 규제 미비로 인해 소비자가 위험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또 역학적 연구 결과(통계)를 개별 흡연자의 질병 원인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도 중요한 쟁점이다. 2심은 특정 개인의 질병 원인을 흡연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밖에 담배회사의 위법행위로 인해 공단이 ‘보험급여’라는 손해를 입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법적 의무를 이행한 것인지에 대한 법리적 해석도 관건이다.
2심 재판부는 공단 측에 비록 패소 판결을 내렸으나, 대상자들이 장기간 고도 흡연자이며 흡연과 밀접한 질환에 걸렸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공단은 이를 대법원에서 승소로 이끌 수 있는 단초로 보고 있다. 사안의 중대성과 사회적 파급력을 고려해, 공단은 대법원 전원합의체 회부와 공개변론을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순히 법리 검토를 넘어 흡연 피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겠다는 전략이다.
현재 150만 명의 국민 서명과 76개 의학회, 86개 지방의회가 공단의 소송을 지지하고 있어, 대법원이 이러한 ‘시대적 요구’와 ‘과학적 사실’을 얼마나 판결에 반영할지가 관건으로 보인다.
◇손해배상액 533억 원 어떻게 산출됐나
건보공단이 손해 배상액으로 내건 533억 원은 흡연과의 인과성이 크다고 본 폐암(소세포암·편평세포암), 후두암(편평세포암) 진단 환자 가운데, ‘30년 이상, 20년간 하루 한 갑 이상 흡연’이라는 조건을 충족한 3,465명에게 2003~2012년 지급한 건보 급여비다.
건보공단은 그간 항소심에서 담배의 위해성과 제조사의 책임을 거듭 강조했다. 특히 지난해 1월에는 호흡기내과 전문의 출신인 정기석 이사장이 직접 법원에 출석해 담배의 위해성을 강조했다.
재판을 앞두고 공단은 최근 11년간 직·간접 흡연으로 인한 건강보험 의료비 지출이 41조 원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연구원은 세계은행(World Bank)과 함께 수행한 연구 결과를 최근 국제학술지(The Lancet Regional Health-Western Pacific)에 실렸다.
연구는 세계질병부담(Global Burden of Disease) 연구방법론을 적용해 건강보험 의료비 지출 규모를 추정했다.
추정 결과, 2014∼2024년 11년간 흡연에 따른 의료비 지출 누적 금액은 약 40조7천억 원(298억6천만 달러)에 달했다. 2024년 한 해만 보면 흡연 관련 의료비가 약 4조6천억 원이었고, 이 가운데 약 82.5%가 건강보험 재정에서 부담됐다.
이 기간 흡연율은 낮아졌지만, 관련 의료비는 2014년 약 2조8천932억 원(20억 달러)에서 10년 만에 69% 급증했다.
인구 통계학적으로는 남성(80.1%)과 50∼79세(80.7%) 연령대에 흡연 관련 의료비 지출이 집중됐다. 남성의 경우 흡연 관련 의료비의 약 90%가 직접 흡연에 따른 것이었으나 여성은 48%가 간접흡연에 따른 것으로 나타났다.
질병군별로 살펴보면 암 관련 의료비가 약 14조 원(105억2천만 달러)으로 전체의 35.2%를 차지했다. 이 중 폐암이 약 7조9천억 원(58억 달러)으로 가장 비중이 컸다.
건강보험연구원 측은 흡연으로 인한 의료비가 폐암 등 중증질환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단은 이 연구 결과가 항소심 판결에 중요한 과학적 근거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결과는 기대와 다르게 끝난 것이다.
◇담배 제조사들이 패배한 해외의 소송 사례
해외 몇 나라의 담배 소송은 단순한 개인의 피해 보상을 넘어, 담배 회사의 은폐된 내부 문서를 공개시키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의료비)을 회수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1998년 미국 담배소송의 역사적 전환점
미국은 1950년대부터 40년 간은 '흡연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논리로 담배 제조사들이 소송에 승리했다. 그러나 1990년 들어 흐름이 바뀌었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1998년 미시시피주를 시작으로 46개 주정부가 흡연으로 인한 주 정부의 메디케이드(저소득층 의료지원) 비용을 돌려달라며 제기한 소송이다. 그 결과 담배 회사들이 향후 25년간 약 2,060억 달러(한화 약 270조 원)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천문학적인 배상금 외에도 담배 광고 제한(만화 캐릭터 사용 금지 등)과 수백만 페이지의 내부 기밀 문건 공개를 이끌어냈다.
-캐나다 법원, 기록적 배상액 결정
퀘벡주 흡연자 약 100만 명이 담배 회사를 상대로 2015년 소송을 제기했다. 그 결과 법원은 담배 회사들이 흡연의 위험을 알리지 않고 허위 광고를 했다며 약 150억 캐나다 달러(약 13조 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는 캐나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배상액이다.
-기타 국가 사례
프랑스 독일 일본은 대체로 '흡연은 개인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라는 논리가 강해 흡연자들이 패소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일본 최고재판소도 2006년 담배 회사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