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젠더

75차례 거부했는데도 성폭력 가해자는 무죄라니…

헌재, ‘동의 없는 성폭력’ 사건 재판소원 본안심사 회부 결정
성폭행을 75차례 거부하고 녹음까지 제출했으나 1,2심서 가해자 무죄
피해 여성, "공정한 재판받을 권리 침해돼"...재판소원 제기
1, 2심, 현행 강간 구성 요건인 ‘폭행·협박’ 최협의설 여전히 적용
시민단체, “강간죄 판단 법적 기준, 동의 여부로 바뀌어야”

한국헬스경제신문 유재민 기자 |
 

국회에서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 중심에서 ‘동의 여부’ 중심으로 바꾸는 형법 개정 논의가 사실상 멈추었다.

 

이런 가운데 여성 및 시민 단체, 법조계가 ‘동의 없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촉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 구심점은 ‘75차례 거부한 동의 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사건이다.


이 사건은 2022년 피해 여성이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75차례에 걸쳐 가해 남성에게 “그만해라”, “아프다”라고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유사강간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피해자는 휴대전화 녹음기능을 이용해 당시 상황을 녹음했고 이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가 1,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피해 여성이 지난 4월 23일 헌재에 재판소원을 낸 사건이다.

 

 

피해자는 재판소원을 내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도 어디선가, 자신의 거부의 말이 상대방의 ‘무시’로 인해 원치 않는 피해를 겪고 법 앞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많은 피해자들의 이름으로 용기 내 이 자리에 함께하게 됐습니다. 피해자의 거부 의사가 가해자의 논리로 재해석되지 않는 나라, 어느 재판부를 만나느냐가 피해자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 나라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헌재가 이 신청에 응답했다. 헌재는 지난 9일 지정재판부의 평의를 거쳐 ‘동의 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사건을 전원재판부 본안심사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와 여성단체들로 꾸려진 ‘동의 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10일 성명을 내고 “성폭력이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기본권의 문제임을 심리하기로 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환영한다”며 “헌재가 헌법이 보장하는 자기결정권의 의미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성폭력 피해자의 기본권 보장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기를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일본·프랑스 등 해외 주요국들은 이미 성폭력을 ‘동의’ 기준으로 법 개정을 마쳤으나 한국만은 여전히 과거 ‘정조’ 중심 보호 관념에서 형성된 ‘최협의 폭행·협박설’에 머물러 있다며 국회에 조속한 법 개정을 촉구했다.


당시 1·2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거절 의사를 인정하면서도,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수반돼야만 강간죄의 성립을 인정하는 ‘최협의설’을 적용한 것이다.

 

피해자는 상고를 요청했지만 검찰은 상고를 포기했다. 이에 피해자는 “법원의 재판으로 성적 자기결정권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이 침해당했다”며 지난 4월 재판소원을 청구했다.

 

피해자의 재판소원을 도운 공대위는 “강간죄의 보호법익이 ‘여성의 정조’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변화된 지 35년 이상 지났음에도 피해자의 거부 의사가 객관적인 자료로 명확히 입증된 사안에서 여전히 사법부가 정조관념에 기초한 최협의의 폭행·협박설에 매몰돼 기본권 보호 의무를 방기했다”며 재판소원 신청 배경을 밝혔다.

 

공대위는 “최협의설은 진정한 거부가 있었다면 강간은 발생할 수 없다는 왜곡된 강간 통념에 기초하고 있다”며 “최협의설은 피해자의 권리 침해를 제대로 살피기보다 성폭력 가해를 처벌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으로 기능해 왔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에서 헌재가 ‘최협의설’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지가 가장 큰 쟁점이다. 2023년 대법원은 강제추행죄 사건에 대해 ‘최협의설’을 폐기하는 판결을 내린 이후 강간죄를 판단할 때 폭행·협박보다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판결이 선고되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처럼 ‘피해자가 목숨 걸고 저항해야 한다’는 강간 통념에 따른 판결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하급심의 들쭉날쭉한 판단이 성폭력 피해 여성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공대위는 “재판관 전원이 참여하는 본안심사 과정에서 이러한 쟁점들이 충분히 다뤄지고, 성폭력 피해를 판단하는 법적 기준이 새롭게 정립되기를 기대하며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현행 형법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을 기본 구성요건으로 하고 있고, 그 해석을 ‘현저히 저항이 곤란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으로 하는 최협의설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2024년 상담통계 분석에 따르면 1년간 모든 유형의 강간 상담 총 218건 중 폭행·협박 없음이 70.2%(153명), 강제·강압이 17%(37명)로 법적으로 폭행·협박을 인정받기 어려운 피해상담이 87.2%에 달했다.

 

폭행·협박이 있는 피해상담은 12.8%(28명)에 불과했는데 그 중 최협의 폭행·협박이 있던 강간 상담은 전체 강간 상담 중 7.3%(16명) 뿐이었다. 최협의설에 따라 7.3%에 해당하는 경우만 명확한 강간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