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헬스경제신문 한기봉 기자 |
1981년 6월 5일,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의학계의 주목을 끄는 짧은 보고서 하나를 발표했다. 로스앤젤레스의 젊은 남성 5명이 ‘매우 드문’ 폐렴에 걸렸다는 내용이었다. 건강한 젊은이들한테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질환이었다.
당시 의사들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누구도 이 작은 보고서가 이후 수천만 명의 생명을 위협하고, 사회와 문화, 정치까지 뒤흔들 세계적 감염병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 질병의 이름은 훗날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가 됐다.
◇원인도 모른 채 지구촌에 확산된 죽음
1980년대 초 미국과 유럽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환자들이 잇따라 발생했다. 환자들은 건강하던 청년들이었지만 면역체계가 무너져 폐렴, 결핵, 암 등 각종 감염병에 무방비 상태가 됐다.
환자들은 남성 동성애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의사들은 처음에 그들에게만 발생하는 희귀병으로 생각했다. 일부 언론은 ‘게이 암(Gay Cancer)’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하지만 곧 이 질병은 동성애자뿐 아니라 수혈 환자, 마약 주사 사용자, 이성애자, 신생아 등 다양한 사람들한테서도 발견됐다.
인류는 전혀 새로운 적과 마주하고 있었다.
◇세계를 공포에 빠뜨린 에이즈
1980~1990년대 에이즈는 사실상 사형선고와 같은 질병이었다. 감염 사실이 확인되면 생존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환자들은 질병 자체뿐 아니라 사회적 편견에도 시달렸다.
많은 나라에서 감염인들은 직장을 잃거나 학교에서 배제됐고, 의료진조차 치료를 꺼리는 경우가 있었다. 에이즈는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차별과 공포의 상징이 됐다.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피해가 심각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수많은 젊은 노동력이 사망했고, 부모를 잃은 고아가 급증했다. 일부 국가는 평균수명이 수십 년이나 감소하는 충격적인 상황을 겪었다.
유엔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약 8500만 명 이상이 HIV에 감염됐으며, 약 4000만 명 이상이 관련 질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에이즈 감염은 대부분 남성 동성연애자들의 성관계에서 감염됐다. HIV 감염자와 콘돔 없이 1회 성관계 시 평균 감염 위험은 항문성교시 약 0.1%~1.4% (70명 중 1명 수준), 일반적 성관계로는 약 0.04~0.08%로 알려져 있다.
◇HIV 바이러스의 발견
1983년 프랑스의 바이러스학자 뤼크 몽타니에 연구팀은 에이즈 환자의 림프절에서 새로운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이후 미국 연구진도 같은 바이러스를 확인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다.
HIV는 인체 면역체계의 핵심인 CD4 T세포를 공격한다. 감염 초기에는 특별한 증상이 없지만 수년이 지나면서 면역력이 점차 약해진다.
치료받지 않을 경우 결국 에이즈 단계로 진행해 각종 감염병과 암에 노출된다. 바이러스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인류는 비로소 적의 얼굴을 알게 됐다.
◇아프리카 원숭이에 감염된 인류
에이즈는 인간에게 새롭게 생겨난 질병이 아니라, 아프리카 침팬지가 오래전부터 보유하던 원숭이면역결핍바이러스(SIV)가 약 100여 년 전 인간에게 넘어와 진화한 결과물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다.
원숭이들은 수천 년 동안 SIV와 함께 살아오면서 어느 정도 적응했기 때문에 인간의 에이즈처럼 심각한 질병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 바이러스가 어떻게 인간에게 넘어왔는지 가장 유력한 가설은 이른바 ‘부시미트(Bushmeat) 가설’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아프리카 중부 지역에서는 침팬지와 원숭이를 사냥해 식량으로 이용하는 일이 흔했다. 사냥이나 해체 과정에서 원숭이의 피가 상처 난 사람 피부를 통해 인간의 혈액으로 들어갔고, 그중 일부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인간 세포에 적응하면서 HIV가 됐다는 것이다.
◇유명인의 죽음이 세상을 바꾸다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있다. 바로 세계적인 록 그룹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다. 그는 1991년 자신이 에이즈 환자임을 공개한 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
전 세계 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제야 에이즈가 특정 집단만의 질병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질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의 죽음은 국제적 에이즈 연구기금 조성과 연구, 예방 캠페인이 급격히 확대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에이즈로 사망한 저명인사들은 생각보다 많다. 특히 1980~1990년대에는 효과적인 치료제가 없었기 때문에 예술가, 배우, 음악가, 스포츠인, 정치인 등이 이 병으로 숨졌다.
할리우드최고의 미남 배우로 통하 록 허드슨(1985년 사망), 명배우 앤소니 퍼킨스(1992년 사망), 프랑스 현대 철학가 미셸 푸코(1984년 사망), 대중적 그래피티 화가 키스 해링(1990년 사망) 등이 있다
◇기적의 치료제 개발 성공
1996년은 에이즈 역사에서 전환점이 된 해였다. 여러 종류의 항바이러스제를 함께 사용하는 ‘칵테일 요법(복합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이 등장해 사망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에이즈 자체를 치료하는 약이라기보다는, 원인 바이러스인 HIV의 증식을 억제하는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ART, Antiretroviral Therapy)다.
과거에는 HIV 감염이 사실상 사망선고와 같았지만, 현재는 치료제를 꾸준히 복용하면 바이러스를 거의 검출되지 않는 수준까지 억제할 수 있다. 이 경우 기대수명도 일반인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현재 가장 많이 쓰이는 치료제는 하루 한 알을 먹는 ‘빅타비’ ‘도바토’ 등 경구용 약이 여럿 있다. 최근에는 ‘카베누바’ 같은 주사치료제가 등장해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1~2개월에 한번 주사를 맞으면 된다. 아직 완치약이나 백신은 없다.
의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감염 위험이 높은 사람에게 미리 약물을 투여해 감염을 예방하는 ‘노출 전 예방요법(PrEP)’이 개발됐다.
감염인이 치료를 꾸준히 받아 혈액 내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는 수준이 되면 성접촉을 통해 타인에게 전파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이를 ‘U=U(Undetectable= Untransmittable)’라고 부른다. 이는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의학계는 장기 지속형 주사제와 유전자 치료 기술을 활용한 완치 연구와 예방 백신 개발에 도전하고 있다. 향후 수십 년 내 에이즈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그러나 에이즈와의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매년 여전히 수백만 명이 새롭게 HIV에 감염되고 있다. 특히 의료 접근성이 낮은 국가에서는 치료제 공급과 예방 교육이 충분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일부 지역에서는 감염인에 대한 차별과 낙인이 여전히 남아 있다.
현재 과학자들은 HIV 완치와 예방 백신 개발에 도전하고 있다. 유전자 치료와 면역치료 기술이 발전하면서 완치 가능성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에이즈가 남긴 교훈
에이즈는 인류에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 새로운 감염병은 언제든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질병보다 더 위험한 것은 무지와 편견이라는 점이다.
1980년대만 해도 에이즈는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과학은 HIV를 발견했고, 치료제를 개발했으며, 환자들의 삶을 되돌려 놓았다. 에이즈는 의학이 질병을 극복한 역사이면서 동시에 인권과 연대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류는 아직까지 에이즈를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공포에 굴복하지 않는 방법은 배웠다.
◇국내 에이즈 현황
1985년 5월, 한국에 체류하던 한 외국인 영어강사에게서 HIV 감염이 처음 확인됐다. 이 사례가 한국에서 공식 보고된 첫 HIV 감염 사례다. 당시 감염 경로는 남성 간 성접촉으로 조사됐다.
최초의 한국인 HIV 감염인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남성 노동자다. 그는 1985년 12월 HIV 양성 판정을 받아 귀국하면서 국내 첫 내국인 HIV 감염인으로 발표됐다. 당시 언론에서는 ‘한국인 첫 에이즈 환자’로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한국의 HIV 역사는 세계 유행보다 약 4년 늦게 시작됐다.
우리나라 최초 에이즈 사망자의 이름이나 신원은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학술자료와 정부 기록을 보면 1980년대 후반부터 에이즈 발병 후 사망 사례가 보고되기 시작했으며, 초기 사망자들은 대부분 익명 처리됐다.
2024년 말 기준 생존 HIV 감염인은 1만 7015명이다. 남성이 94%다. 연령별로는 30~34세가 2616명으로 가장 많고, 나이가 들수록 적어진다. HIV 감염인은 계속 증가하지만 사망자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수년째 120~150명 대를 유지하고 있다.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의 발전으로 HIV가 과거의 ‘치명적 질환’에서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숫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