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헬스경제신문 | 박건우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신경과 교수
장관이나 고위 공직자 임명에 혹독한 통과의례가 있다. 인사청문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한쪽에서는 왜 기억을 못 하냐고 윽박지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기억이 없다고 한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기억이 다르다며 인지기능에 이상이 있다고 공방을 벌인다. 모두가 아는 관념이지만 또 막상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이 낯선 세계를 들여다본다.
기억이란 왜 필요한 것인가
기억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이라
고 쓰여 있다.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왜 우리는 의식 속에 간직하고 다시 생각해 내야 하는가? 이는 개인과 사회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무런 지식이나 정보가 없는 곳에 혼자 있게 된다면 한 개인이 생존할 수 있을까?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이 나에게 해를 주는 것인지, 이익을 주는 것인지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까? 나무 사이에 있는 버섯이 독버섯인지 식용버섯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억은 인간 생존을 위해 필수 요소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억 요소의 적절한 조합
만이 적절한 행동을 이끌어 낸다. 기억은 외부 환경과 나 자신의 반응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기억은 과거와 현재, 개인과 집단을 잇는 연결 고리이다.
한 사회의 정체성은 그 사회의 문화와 가치로 정의되는데, 이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데 필요한 것이 교육이다. 교육은 상당 부분 문화와 가치 전승을 위한 기억을 중요시한다. 특히 문자가 발달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중요한 역사와 가치 전승에 ‘잘 기억하는 사람’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기억은 어떻게 형성이 되나
뇌에 정말 기억 회로가 존재할까? 1937년 미국의 신경과학자인 제임스 파페스 박사는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는 신경회로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감정 표현과 연관이 있는 뇌 구조물들을 연결하였고, 그 연결 경로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파페스 회로라고 하였다. 이후 다른 과학자들이 이 파페스 회로가 망가지게 되면 감정뿐만 아니라 기억이 상실됨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기억과 연관이 있는 중요 회로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회로의 중심에는 해마라는 구조물이 있다. 해마에 들어온 정보는 파페스 회로를 통해 전체 뇌
로 전달되며, 해마는 해당 정보가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대뇌로 전달해 저장한다. 기억이 형성되려면, 등록이 되는 과정, 저장이 되는 과정, 저장된 내용을 끄집어내는 과정이 온전해야 한다.
기억 상실은 왜 나타나나
그 회로를 따라가 보자. 기억의 첫 관문인 해마는 발생학적으로 분화가 잘된 구조가 아니다. 도리어 분화가 채 완성되지 않은 매우 역동적 구조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높은 대사 활동량을 보이며 그만큼 외부 자극에 취약해 손상되기 쉽다.
해마가 일을 과거처럼 왕성하게 하지 못하면 기억 자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즉 기억 등록이 안 된다. 치매의 가장 흔한 원인인 알츠하이머병의 특성을 보면 해마가 서서히 병적으로 작아진다. 해마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기억 등록이 안 되고, 결국 최근의 기억 자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한편 해마가 적절히 일을 하더라도, 기억 연결로가 망가지면 기억을 저장하는 것이 잘 안 된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예가 과음 후 기억이 안 나는 현상이다. 과음을 하면 해마에서 뇌로 전달되는 신경 전달이 제대로 안 된다. 즉 해마의 기능이 저하되어 뇌에 기억이 저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을 못 한다고 한다.
또한 뇌가 많이 손상되면 기억 저장 창고 자체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기억을 불러올 수 없다. 교통사고 등으로 뇌를 심하게 다치게 되면 기억이 사라질 수 있다. 다양한 뇌 질환에 의해 기억은 손상된다.
기억은 정말 믿을 만한 것일까
우리는 자신에게 좋은 것만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다. 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전달하는 내용은 사
람마다 다를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언어나 행동으로 끄집어내
측정할 수 있는 기억이 좋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력은 어떻게 측정할까? 간단한 예로 시험이라는 과정을 통해 점수로 수치화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측정 가능한 기억은 실생활 기억과 차이가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감정에 의해 기억은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왜곡이 심해지면 기억을 지울 수도 있다.
엄청난 재난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분석해 보면 일부 기억을 지운 무의식적 작용을 찾아낼 수 있다. 우리의 심리적 기전은 기억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다. 각종 인사청문회에서 고위 공직자들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과학자 입장에서 대부분의 발언은 무의식적이라기보다는 의식적으로 연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학적 기억 상실과 맥락이 크게 다르다. 즉 고위 공직자의 기억 상실 진위 여부는 뇌과 학을 다루는 의학의 판단 대상이 아니다. 국회 청문회에서 치매 전문가에게 자문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 이 기고는 대한보건협회 <더행복한 건강생활>과 함께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