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헬스경제신문 | 오동진 영화평론가
COVID-19 사태가 준 (아주아주 미세한) 긍정적 효과 하나는 사람들에게 감기가 자신들을 죽일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줬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감기란 때가 되면 와서 며칠 좀 아프다가 지나가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목 아플 때 먹는 약, 콧물 날 때 먹는 약, 몸이 이곳저곳 쑤실 때 먹는 약 등등 치료약도 다 개발돼 있다고 생각했다. 감기 바이러스가 변이에 변이를 거쳐 매번 새롭게 치명적으로 진화할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건 어쩌면 역사 의식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독감 바이러스는 그동안 줄곧, 잊을 만하면 다시 창궐해서 사람들을 엄청나게 해쳐 왔기 때문이다. 1918년의 스페인 독감은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당긴 요소가 됐었다. 당시 추산으로 세계 인구 5천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지만 통계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때라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로서는 1억 명으로까지 유추하고 있다.
1968년의 홍콩 독감도 역사에 남는 사건이었다. 최대 400만 명이 사망했다. 독감과 감기는 늘 인류 역사의 어두운 그늘이었다. 인류 말살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최대 병기였던 셈이다. 그걸 자꾸 사람들은 잊어버린다. 의외로 감기 영화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중 김성수 감독(2023년 <서울의 봄>으로 무려 13,128,427명의 관객을 모았다.)이 2013년에 만든 <감기>는 제목부터 감기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음을 보여 준 작품이다. 초당 3.4명을 감염시키며 36시간 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상 최악의 H5N1형 바이러스가 경기도 분당에서 발생한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이 바이러스를 분당 안으로 묶어 내려는 정부의 강압적 통제 전략과 분당 안에서 살아남아 밖으로 탈출하려 고군분투하는 일군의 사람들 모습을 교차시킨다. 김성수의 영화치고 시나리오가 다소 엉성한 데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극단화돼 있어 완성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개봉 당시 바이러스 재난 블록버스터로서 대중 흥행에는 성공했던 작품이다. 장혁과 수애, 유해진, 마동석 등 스타 캐스팅에 주력한 덕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 <감기> 때만 해도 감기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가 치명적인 돌연변이를 일으켜 팬데믹을만들고 인구 수십만 명을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건 그저 영화일 뿐이라고들 생각했다. 사람들은 흔히 영화가 비현실의 현실성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한다.
스크린으로 보여지는 ‘현실 사건의 재현’에 대해 사람들은 ‘아 저건 그냥 영화일 뿐이야.’, ‘저건 판타지일 뿐이야.’라며 ‘비현실성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려애쓴다. 현실에서 저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착시를 일으킨다. 그러나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동시에 영화가 현실의 비현실성을 지니고 있음도 생각하지 못한다.
현실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국회 청문회 등에서의 폭로전, 공방 같은 것이라든가 비행기 추락, 각종 총기 사고 등)은 영화보다 더욱더 극적일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입을 떡 벌리며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영화 <감기>는 그 두 가지 상황, 즉 영화 같은 현실, 현실 같은 영화의 사이에 놓여 있었던 작품이다. 영화 <감기>는 개봉 당시 가상을 다룬 이야기였으나, 6년 뒤 2019년 COVID-19가 발생하면서 예언적 현실직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침 감기로 시작하는 COVID-19는 치명적 독감처럼 증세가 악화한 후 결국 호흡 곤란, 폐렴, 패혈증 등을 일으켜 사망에까지 이르게 한다.
COVID-19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보여 줬던 극도의 혼돈과 혼란은 영화 <감기>에서 분당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청담대교를 건너려 하고 바리케이드를 친 채 그들을 막으려는 정부군이 시민에게 총을 쏘기까지 하는 장면과 겹친다. 현실과 비현실은 이상한 방식으로 중첩된다.
처음엔 다 감기처럼 온다. 바이러스 영화의 대표 격으로 불리는 <아웃브레이크>(1995) 역시 몸의 신호가 감기처럼 오는 것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전이되어 출혈열로 이어지는 이 바이러스는 영화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사람들을 죽여 나간다. 그러니 비록 사소한 증상이더라도 감기는 늘 철저한 경계가 우선이다. 물론 감기는 사랑과 애정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는 ‘감기는 옮기는 게 약’이라며 상대의 바이러스를 자신에게 전이시키려는 애교 있는 행동을 스스로 서슴지 않는다.
COVID-19가 최고조로 기승을 부릴 때 엄마들은 감염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고 아이들을 돌보기도 했다. 병균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정신과 헌신의 마음까지는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수많은 영화 속에서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이 감동적인 것은 거기에 늘 희생의 스토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감기 조심하세요.”는 1960년대 말 성우 장유진의 더빙으로 제작된 감기약 광고 멘트이다. 스카프를 한 인형이 모델이었다. 이후 진희경이(2003), 다음엔 박보영이(2018), 다음은 혜리가(2022~2024), 최근에는 고민시가 해당 광고 모델을 하고 있다. 모델이 누구이든 이 광고 멘트는 전 국민이 다 기억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이 약이 궁극의 명약은 아니다. 감기는 자기 자신과 공동체의 면역력이 막아 낸다.
* 이 기고는 대한보건협회 <더행복한 건강생활>과 함께 제공됩니다.












